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개역 성경 (문단 편집) === 단점 === 개역 성경은 조선이 히브리어/희랍어는 커녕 영어 번역조차 인프라가 얕던 시절에 튀어나온 물건이다. 장점란에서 설명했듯, 이는 남들이 굴삭기 쓸 때 홀로 야전삽 들고 토목공사를 한 것에 비견할 업적이다. 문제는 이미 굴삭기를 무더기로 가졌는데, 개역 성경이라는 굳어진 관습 때문에 굴삭기를 제대로 써먹질 못한다는 점이다. 한국 개신교는 이미 20세기 후반에 히브리어/희랍어 번역 인프라를 완비했고, 독어권/영어권에서 성서학 박사 학위를 받은 학자는 현장에 넘쳐난다.[* 인터넷에서 자주 희화화 되지만, 한국 개신교의 성서학 인프라는 결코 낮지 않다.] 2030년대에 개역개정을 다시 원문 대조해서 새로운 판을 내갰다는 건 분명 의미 있는 일이지만, 2030년대에 중역의 개정판을 교단 표준용으로 쓰는 건 정말 심각한 것이다. 중역의 원문 대조 개정보다는, 처음부터 원문에서 번역된 것이 당연 더 낫다. 굴삭기가 이미 있는데, 왜 써먹질 못한다는 말인가? 신학적으로 섬세한 부분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하는 부분도 있다. 한 예시로 사도 바울의 인간학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고린도전서 2장 14절을 다음과 같이 의역했다. >14. '육에 속한(Psychikos)'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pneumatikōs)' 분별되기 때문이라 >15. '신령한(pneumatikos)'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 >고린도전서 2장 14-15절(개역개정) 여기서 개역개정이 '육에 속한'으로 의역한 Psychikos는 글자 그대로는 '혼(魂)적인'을 의미하며, 15절의 영적인(pneumatikos)과 대립하는 의미에서 쓰였다. 즉 '혼적인' 사람을 '육에 속한' 사람으로 의역한 것이다. 이런 의역이 발생한 이유는, 사도 바울이 영(pneuma)[* spiritus(라틴어), spirit(영어), esprit(불어)], 혼(psychē)[* anima(라틴어), soul(영어), âme(불어)], 몸(sōma)[* corpus(라틴어), body(영어), corps(불어)]이라는 세 가지 측면에서 인간을 바라본다는 것을[* 참고: 데살로니카전서 5장 23절]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영적인(pneumatikos) 것과 대립되는 것 = 육적인 것"이라는 논리로 번역했기 때문이다. 물론 대중들에겐 영과 혼의 구분이라는 바울적 인간학이 익숙하지 않기에, 이 말을 쉽게 풀어쓰는 건 옳다. 그래서 다른 성경들은 14절의 Psychikos를 다음과 같이 번역한다:[* 반면 다음은 직역 사례다: animalis{{{-2 (히에로니무스)}}}, psychique{{{-2 (La Bible de Jérusalem)}}}] ||자연에 속한{{{-2 (표준새번역)}}}, 믿지 않는{{{-2 (새한글)}}}, 영적이 아닌{{{-2 (공동번역)}}}, 현세적{{{-2 (한국천주교주교회의)}}}, unspiritual(RSV, NRSV), without the Spirit(NIV).|| 이 번역들은 14절의 인간이 15절의 '영적인' 인간과 대립한다는 의미를 살리려고 의역을 하였다. 그러나 '혼적인'을 '육에 속한'으로 의역한 개역개정은 현대 성서학의 매우 섬세한 주제인 바울의 인간학[* 영(pneuma), 혼(psychē), 몸(sōma)의 세 가지 측면으로 파악되는 인간. 몸(sōma)과 동일시되는 듯 하면서도 다른 육(sarx)이라는 말의 미묘한 뉘앙스.]에서 상당히 민감한 단어인 육(sarx)을 사용함으로써 진지하게 성경을 연구하려는 독자에게 혼란을 주고 있다. 번역자가 객관성을 지켰을 것이라고 아무리 믿어주려 해도, 문제는 그렇게 옮긴 '원본'이 중역의 중역을 거치면서 온갖 주관성이 잔뜩 들어간 판본을 거칠대로 거친 상태라는 것이다. [[히브리어]]/[[그리스어]]→[[영어]]([[KJV|킹 제임스 성경]][* 원전 번역이지만 [[라틴어]]([[불가타]]) 성경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으며 여러가지 문제로 인해 사심이 굉장히 많이 들어갔다는 비판을 피하지 못한다.], RV 및 ASV)[* KJV에 여러모로 훤히 들여다 보이는 사심들, 지나치게 감정적인 문체 등 여러 미심쩍인 요소들을 최대한 배제하려한 노력의 산물이다. 이 과정에서 사해 문서도 꽤나 요긴하게 활용되었다.] →[[중국어]] 문리역.[* 현대 [[중화인민공화국]]의 [[표준중국어]]와는 차이가 있음.]→[[한국어]][* 성경의 번역 계보는 [[http://www.bskorea.or.kr/about/owntrans/genealogy/genealogy.aspx#|이곳]]을 참조.]로 중역(重譯)되어 전파된 것이다. 성경은 이름에 의미가 별도로 부여되는 압자드 문자 계열 언어와 의미를 잘 두지 않고 두더라도 그리 중요하게 쓰이지 않는 후대의 알파벳 문자 계열 언어가 합쳐진 책이다. 따지고 올라가면 두 문자의 계보가 모두 페니키아 문자로 이어지며, 따라서 그리스어도 이름에 그 어원에 따른 의미가 별도로 존재하는 등 어느정도는 비슷한 구석이 있다. 그러나 더 후대로 가면 언어가 이리저리 크게 바뀌면서 특성이 상당히 달라져, 두 문자 체계 기반 언어들의 미묘한 호환성이 상당부분 퇴색된다. 이 과정에서 성경 번역에도 여러가지 혼란이 있을 수 밖에 없었고, 성경의 구성 책들의 편집에 대해서도[* 책들의 순서도 매우 중요하다.] 여러가지 문제거리와 사건사고가 있었기에 상당히 오랫동안 성경 번역에 사심이 너무 많이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이 모든 번역 과정은 기존에 잔뜩 들어간 사심들을 후대가 요령껏 제거하는 과정을 거친 것인데. 이는 결국 왜곡을 왜곡으로 해결했다는 것과 다름 없다. (...) 상술한 히브리어와 그리스어 체계의 차이는 후대의 번역한 판본이 번역한 언어의 특성에 따라 큰 제약을 받을 수 밖에 없게 만든다. 하필이면 압자드 계열에서 특히 눈에 띄는 이름에 붙은 의미 개념이 거의 퇴색된 '''영어'''로 번역된 판본을, 그와 정 반대로 아예 표의 문자라서 모든 문자에 뜻이 붙어 있는 '''한문'''으로 구성된 '''중국어''' 판본으로 번역한 것을 알파벳에 속하는 한글을 문자로 쓰며 동시에 한자어가 존재하여 표의 계열 언어들의 특성도 공유하는 '''한국어'''로 중역한 것이라 도대체 어떻게 하면 이런 번역 결과물이 도출 될 수 있는지 부터가 미스터리다. RSV의 중국어 문리역을 중역한 판본인 만큼 개역 성경은 사실상 영어 성서를 한국어로 바꿔놓은 것과 다름 없는 형태로 되어 있다. 한국어로 저질 번역된 전공책과 같은 꼴인 셈이다. 도대체 왜 이런 괴상한 문법 구조를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없어 골치아프기 십상인데, RSV와 대조해보면 왜 이딴식으로 번역된 것인지 알 수 있다. 영어 문장과 한 문장 한 문장 1대1로 대응된다. 즉, '''번역체가 번역 의도다.''' 이것을 위해 아예 한국어 문법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영어 문법을 한국어로 옮겨 놓아, 한국어로는 명백히 비문, 그러나 영어 문법으로 접근해서 읽으면 "그냥 영어"인 문장들이 가득하다. 이런 괴상한 문장들은 능동과 피동이 모호하게 서술된 부분에서 유독 눈에 띄는데, 복음서들 끝 부분의 예수 부활 부분 문장들은 "돌이 '''굴려''' 옮기운 것을 보고" (누가복음 24장 2절) 같이 능동/피동이 뒤바뀐 해괴한 경우까지 있다.[* 비단 이 구절 말고도, 이중피동 형태로 된 문장이 곳곳에서 보인다.] '죽으시다'(죽으셨다.)와 '죽임당하다'도 개역한글의 괴상한 비문 최강으로 꼽을 만하다. 이것들을 영어로 바꿔서 보면 깔끔하게 문법에 맞는 문장이고 별 특이점은 없어보인다. 성경에서 자주 등장하는 함정인 문장의 주체가 모호하게 뒤섞이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음에도 영어 판본을 영어를 쓰는 독자가 읽을때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채기 매우 어렵다. 그런데, 이 영어 판본의 문법을 한국어에 끼워맞춰 넣으려고 괴상한 비문을 만들 결과, 문장의 주체가 모호하게 뒤섞인 것이 매우 강조되어 확연히 눈에 들어올 수준이 되었다. 이런 내용들은 얼핏 성경의 원문 자체에 있는 문법적 오류나 함정적인 서술 구조를[* 화자가 자꾸 뒤바뀌는 아가서나 그 유명한 알파, 오메가, 처음, 나중, 시작, 끝 구절이 책 마지막에 와서 화자가 불명확한 상태에서 다시 나오는 요한계시록 등. 그 외에도 프롤로그와 실제 내용 간의 설정 오류가 실수가 아니라 그냥 대놓고 내놓은 것 같이 보이는 욥기나,(사단이 하나님과 내기를 한다는 설정이었는데 본론으로 들어오니 능동이 아니라 수동으로 변신한다) 인삿말을 엽서 봉투처럼 쓰고 있는 서신서 등을 꼽을만 하다.] 고스란히 옮기기 위해서 한글 문법을 의도적으로 파괴한 것으로 보이지만, 문장들이 영문 RSV와 1대1로 대응된다는 점을 보면 딱히 그런 의도로 한글 문법을 의도적으로 마개조 해놓았다고 하기도 어렵다. 절대로 이 판본이 진짜로 번역을 제대로해서 그렇게 된게 아니라 사심 가득 들어간 엉터리 번역들이 반복된 상태에서, 그것을 역시 주먹구구식으로 정리한, 그러나 옛 언어들과 특성이 굉장히 달라진 언어로 번역된 판본을, 그 판본과 또 정 반대의 특성을 가진 언어로 번역하고, 그것을 그대로 옮겨 놓은, 제대로 번역이 되어있을래야 있을 수 없는 판본이 개역 성경이다. 아무리 중국어 문장 구조가 영어와 동일하다지만 문자의 특성이 정 반대인데, 그걸 한국어로 그대로 1대1로 옮겨놓았더니 영어와 1대1로 호환된다는 것도 도대체 어떻게 가능한 일인지 의문이다. 후술하겠지만, 많은 개신교인들이 개역개정의 장점으로 '장중한 문체의 아름다움' 등을 들지만 정작 '''국문학계의 거두'''인 [[이오덕(아동문학가)|이오덕]]은 되려 [[http://kulssugi.or.kr/bbs/board.php?bo_table=teacher_bo01_02&wr_id=95&page=1|공동번역]]판의 문체가 한국말의 입말을 자연스럽게 썼다고 공동번역의 문체를 극찬한다. 이오덕의 개역성경 비판론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 앞에서 든 공동번역 성서는 글월의 끝이 모두 ‘―다’로 되어 있지만, 뒤에 든 『신약전서』는 글월의 끝이 모두 ‘―라’로 되어 있어, 이것만 보아도 오늘의 사람들에게는 『신약전서』의 문장이 글말체라고 느끼기에 충분하지만,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는 중국글을 새겨 읽는 꼴이 되어 우리가 입으로 하는 말이라고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글이 되어 있다. > 이오덕, <<우리 문장 쓰기>> /한길사/1992 개역개정에서 수정된 문장들의 대부분은 저런 기묘한 비문 중에서, 너무하다 싶은 것들을 좀 더 매끄럽게 적당히 손본 것들이며, 수정 후에도 여전히(!) 비문인 문장들이 아주 많다. 개역한글과 비교하면 약간 나아졌지만, 일상에서 쓰는 문어체와 한참 동떨어진, 어법상으로도 들어맞지 않은 표현과 불편한 가독성은 개역개정도 다르지 않다.[* 그 와중에 서신서에 드물게 나오는 말줄임표는 또 뜬금없이 삭제했는데, 차라리 말줄임표가 그대로 있는 게 나은 수준의 비문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개역판의 큰 단점 중 하나는 만연체라서 문장 호흡이 너무 길다는 것이다. 유일한 예외는 서신서에서만 특수한 목적으로 사용되는 말줄임표뿐이다. 문장부호 비슷한 것으로 고리점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이는 편의를 위해 사건별로 구분을 해둔 것이지 실제 문장부호로 쓸 목적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다. 개역한글은 구역을 최소한으로만 수정하여 발간한 것인데, 그 '최소한의 수정'에 문장부호는 들어가지 않았다. 이것이 전통 아닌 전통이 되어, 1979년에 개역 신약에서 문장부호를 넣어보았지만 사람들의 반응이 차가웠기에 결국 대한성서공회조차도 개역개정에 문장부호 넣기를 포기하고 과거 번역판을 따른 것이다. 또 다른 단점은 당시 시대상을 반영한 번안과 한문식 음차로 영어와 다른 외래어를 흔히 쓰는 현대 한국어와 너무 다르단 점이다. 예를 들어 지명은 그냥 한국어 화자의 발음 습관을 반영한 한자식 어투이고, 올리브나무 등은 감람나무(창8:11, 계11:4 등)로, 스튜를 팥죽(창25:34)으로 번역한 점 등이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빵이 떡(눅22:19 등)으로 번안된 것인데[* 이 떡이라는 번역때문에 한국에는 [[성만찬]]에서 떡을 쓰는 일부 교회가 있을 정도.], 아무리 번역 당시의 시대상을 감안해야 한다지만 '주식'인 빵이 '특식'인 떡으로 번안된 것은 정확한 번역이라 하기 어렵고, 특히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는 말씀에서 더욱 그렇다. 그리고 계보가 혼잡하고 그것마저도 [[중역]]을 해서 나오는 물건이라는 본질적인 문제도 빼 놓을 수 없다.이라 번역상 오류가 생길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아무리 직역을 했다고 하지만 그것이 히브리어, 그리스어 원문에서 직역된 것이 아니라, 중국어 문리역에 1:1 대응되게끔 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직역의 의의가 크게 퇴색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